[스크랩] 펌글입네다.
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글입니다.
글 솜씨도 좋지만 한 번 읽고 우리 사회 현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정리하여 공유해 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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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목: 그믐이 되얏는가.
어리중천에 초승달 걸렸는데 그믐이 되얏는가.
어리중천에 초승달 걸렸는데,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무더기에 마음이 시리네. 다들 여일허것지.
추석에 맏이네는 큰놈 중간고사라고 차례상 앞에 궁둥이 두어번 조아린 뒤 그 길로 내빼더니 전교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렷다.
둘째네는 보리와 콩도 분간 못하는 코흘리개를 데리고 명절에 구라파로 역사 여행 간다더니 이순신보다 나폴레옹 생애를 줄줄 외는 신동이 나겠구나.
막내 며늘애는 당직이라 우는 시늉을 하더니 혹 몸져누운 것이냐.
요즘처럼 황망한 세상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삼 형제가 약속이나 한 듯 감감하니 아비어미 죽어 달포가 지나도 부고 낼 자식이 없을까 두렵도다.
내 오늘 단톡을 소집한 것은 중차대히 전할 말이 있어서다. 너희 어머니, 즉 내 아내가 쓰러졌다.
당나라 군대에 쫓기 듯 차례상 걷기 무섭게 달아난 자식들이 남긴 설거지와 빨래, 먼지더미를 사흘 내 쓸고 닦더니 새벽녘 밭일 간다고 나서다 고꾸라져 응급실로 실려갔다. 의사왈, 고혈압,당뇨,갑상선 약을 달고 사는 노인이 끼니는 거르고 중노동만 하니 몸이 배겨내겠소. 와중에도 자식들 심란하게 전화 걸지 말라 다잡는 너희 어미를 보며 내 가슴을 쳤노라. 저 여자는 무슨 죄 있어 평생 구두쇠 서방 잔소리에 망나니 사내자식들 키우면서 쓰다 달다 말이 없는가. 제사도 1회, 명절도 1회로 줄였거늘 그도 못마땅해 입이 댓 발 나온 며늘애들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저 여인은 바보인가 천치인가.
두 늙은이 굽은 등으로 다리 절며, 고추며 열무를 수확해 앞앞이 택배를 올려 보내도 고맙다 전화 한 통 없는 자식들은 원수인가, 애물단지인가? 하여 결단했느니, 앞으로 우리 집안에 명절은 없다. 제사도 없다. 칠순이고, 팔순이고 생일잔치도 막살할 것이며, 어버이날이니 크리스마스니 하여 요란 떨 일은 더더욱 없다. 고로 상속도 없다. 우리 부부 가진 거라곤 벼룩 콧등만 한 집 한 채 뿐이나, 무덤에 지고 갈지언정 너희한테 물려주지 않겠다.
군청 말단으로 취직해 봉급은 쥐꼬리만 하나, 손끝 맵짜게 살림하는 여인 만나 아끼고 쟁여온 덕에 옴팡간 장만한 재산이다. 이를 남김없이 갖다 팔아 바다건너라고는 울릉도밖에 못 가본 저 늙은 아내와 세계 곳곳을 주유천하 하며, 몽땅 써버리고 죽을련다. 나의 아내에게도 면세점이란 곳에서 외제 화장품, 외제 손가방도 사줘 보고,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연애했다던 불란서 카페에 가서 쓰디쓴 커피도 한 잔씩 마셔 볼 것이며, 천국과 한 뼘 거리라는 융프라우에 올라 온 세상 발밑에 두고 사진 한 방 멋지게 남겨 볼련다.
우리가 돈을 쓸 줄 몰라 허리띠 졸라맨 줄 아느냐. 영어를 몰라 해외여행 마다한 줄 아느냐. 한 치 앞 안 보이는 세상, 앞길 구만리인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될까 이 악물고 살아온 죄밖에 없느니. 그런 우리한테 꼰대니 틀딱이니 손 가락질하는 인심이 기가 차기만 한데, 내자식도 별수 없다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도다.
내 비록 날샌 올빼미 신세이나 가장(家長)의 이름으로 남기는 마지막 부탁은, 부디 덕과 예로써 세상을 살거라. 의로운 것이 아니면 머리카락 한 올도 취하지 말고, 자식들은 재주보다 덕(德)이 앞서는 사람으로 키워라. 또한 아끼며 살거라. 사람 잡아가느라 온나라가 시끄럽고 권세가들 헛된 꿈과 아전들 잔꾀에 백성들 곳간엔 해 넘길 양식이 없나니, 밤낮 궁둥이에서 비파 소리 나게 놀러만 다니다간 쌀독이 바닥날 터.
사방에 승냥이 떼들 덤빈다고 분기탱천 하지도 말거라.
적을 두려워하며 대처하는 자는 이길 것이나, 세상에 나만 한 사람 없다고 믿는 자는 망하리라. 아닌 밤 홍두깨 유언에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낯빛일 것 없다.
바람처럼 와서 구름처럼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. 천지간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창공을 훨훨 나는 두 마리 학처럼 세상을 떠돌 것이니, 어느 날 우리 내외 부고가 들려와도 슬퍼하지 말거라. 오뉴월 물오이처럼 쑥쑥 자랄 내 손주 들 못 보는 것이 다만 애통할진저.
※P.S: 여행갈 때 등산복 좀 입지 말라고 눈 흘긴 게 둘째더냐. 너희가 멀쩡한 바지를 찢어 입든 꿰매 입든 내 일절 참견하지 않았느니, 우리가 빤스만 입고 비행기를 타든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든 괘념치 말라.
글 품새가 왜 이리 현란한가 물었더냐. 마음이 헛헛하여 '국수'란 대하소설을 읽었더니 절로 되었다. 우리말의 찬란한 보고(寶庫)요, 구한말과 다름 없는 이 나라의 살길이 담겼느니, 일독을 권하노라.~♡